모던 보빙사

모던 보빙사 EP11 - Moravec’s paradox

버드나무맨 2023. 11. 4. 13:46

이름부터 환상적인 말리부에 다녀왔다. LA에 여러 해변이 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말리부 해변에 돗자리 펼쳐놓고 누워서 책을 읽었다. 출발할 때 보니 구글 맵에 강풍경보가 있어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출발했는데 막상 가보니 한국의 바닷바람에 비하면 솔직히 엄살이다. 수시로 스스로의 강함을 어필하는 미국인들이지만 이런 안전 관련한 부분에서는 엄살이다싶을 정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리스크 관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이 따갑긴했지만 볼만했다. 최근 <Simply Complexity: A Clear Guide to Complexity Theory>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책상이 왜 지저분해지는지를 복잡계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데 카오스와 질서가 모두 같은 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복잡계의 핵심 아이디어는 언제 봐도 흥미롭고 신기하다. 

 

 

집 근처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하는 ESL 수업을 들으러 갔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친구들과 영어를 배우며 친해질 수 있는 곳이라해서 부푼 마음을 안고 갔지만 내가 간 곳은 거의 대부분 중국분들이었다. 그리고 따로 레벨 테스트를 받을 시간을 내기 번거로워 그냥 들어갈 수 있는 수업을 신청했는데 생각보다 같이 듣는 수강생들의 수준이 낮았다. 분명 Advanced Conversation이라 써져있었는데 Fabric이 무엇인지 중국어로 말해줘야 아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수강생들이 모여있는 수업이라서 당황했다. 

 

실력은 천차만별이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수강생들의 눈빛이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제대로 된 비자도 없이 온 신분이 불안정한 분도 몇 명 있었는데 눈빛에서 배움에 대한 열의가 뿜어져 나온다. 특히 인상깊었던 분은 하얼빈 쪽에서 살다가 베이징으로 이사가서 20년 정도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중년 여성 분이었다. 아주 작은 시골 동네에서 살다가 베이징이라는 도시를 경험했고 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미국으로 왔다고 이야기했다. 떠듬떠듬 중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I love adventure."라고 말하는데 참 오랜만에 Adventure라는 단어를 듣게 되어 반가웠다. 확률이 어떻고 시장이 어떠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Adventure라는 단어로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는 이 순수함이 참 낯설고 부러웠다. 이 분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지는 단어였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 분은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혹시 서울대 나왔냐고 바로 맞추셨다. 한국도 여행으로 몇 번 다녀왔다고 이야기하며 너는 여기 수업에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농담하셨다. 

 

다른 한 분은 공업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신 분이었다. 이 분은 좀 더 영어가 능숙해 다른 수강생들이 이해 못하는 부분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또 대신하여 전달하기도 했다. 재밌었던게 이 분이 자신의 직업을 설명하며 펜이나 책상 이런 것을 디자인한다고 말하는데 다른 중국인 아주머니가 정말로 따지듯이 어떻게 다 만들 수 있냐, 배우는게 다르지 않냐고 물어봤다.

 

이 따지듯 물어본 중국인 아주머니도 참 흥미로웠는데 도회적이라는 단어의 정반대에 있는, 정말 시골 사람같은 분이었다. 시골에서 오래 생활한 분에게 종종 관찰되는 순박한 무례함이 있는 분이었는데 모든 것을 따지듯이 물어 그 모습을 보는게 나름 웃겼다. 스무고개같은 게임을 하는데 내가 텀블러를 설명하며 컵이 아니라고 했다 나중에 텀블러임을 밝히자 어떻게 컵이 아니냐며, 흥분해서 따지시는데 그 모습이 불쾌하기보다는 스무고개에 그렇게 진심인 모습이 조금은 귀엽게 느껴졌다. 

 

그 외 내 또래로 보이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젊은 중국인 분도 있었는데 그 분이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바지는 정말 워크웨어 그 자체였다. 곳곳에 있는 페인트 얼룩과 티셔츠의 빛바랜 색감은 워크웨어 감성 그 자체였다. 칼하트스러움이 사실은 이런 감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이상 칼하트에는 없는 칼하트 감성을 이 분의 티셔츠에서 느낄 수 있었다. 

 

수업은 이탈리아에서 20년 전에 오신 선생님이 진행하는데 중간중간 설명이 틀리거나 잘못된 스펠링을 적으셨다. 미국에서는 교사의 역량이 한국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ESL강사를 선정하는 기준도 왠지 한국에서 강사를 선정할 때보다 느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친절하신 분으로 수업이 끝나고 혹시 다른 수업을 추천받을 수 있을지 여쭤보니 아주 열심히 강의를 알아봐주셨다. 미국에서는 Office Hour를 꼭 지켜야하고 수업 끝나고 따로 물어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 걱정했는데 ESL같은 가벼운 수업에서는 그렇게 엄격한 것 같지는 않다. 

 

캠퍼스 곳곳에는 전자레인지가 있다. 전자레인지 돌릴 때 뚜껑을 닫고 돌리라는 안내가 써져있다. 미국에서 공짜가 잘 없는데 이 전자레인지 옆에는 닦을 수 있는 티슈가 놓여있다. 이 ESL 수업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데 이 수업과 전자레인지, 그 옆 티슈에서 미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공공성을 느낄 수 있었다. 

 

 

장붓구멍이라는 말 들어본 사람? 한국에서는 건물이 오래된 경우가 많지 않다보니 집에서 수리할 일이 많지 않은데 여기서는 집이 기본 20~30년은 되었다보니 하루가 멀다하고 수리할 일들이 생긴다. 내 방에서도 문 손잡이를 갈아야할 일이 생겨 문 손잡이를 알아보는데 난생처음 보는 영어단어들이 많아 한글로 찾아봤는데 한글로도 장붓구멍같은 단어들이다. 영어라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 한국에서는 이런 문을 바꾸는 일이 별로 없고 대부분 스마트락에 많지 않은 금액에 출장 서비스가 제공되니 이런 것들을 챙겨볼 일이 없지만 미국에서는 DIY, 다 직접 갈아야하다보니 이런 단어들의 사용빈도가 꽤 많다. 정말 간단하게 드라이버로 교체만하면 되었는데 하필 마지막 나사가 마모되어 드라이버로 뺄 수가 없어 방법을 찾는데 주말 오전을 날렸다. 

 

한국에서는 이런 모든 것들이 편리하게 제공되니 정말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여기서는 스스로 직접 챙겨야 한다. 근데 또 이렇게 잘 챙기는, 생활력 있는 모습이 여기서 매력적으로 평가되는 인물상인 것 같다. 맥가이버가 왜 그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잘 느낄 수 있다. 

 

Home Depot를 가보면 이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재미없어 보이는 별에별 공구들이 다 모인 유통체인인데 개인적으로 월마트와 더불어 홈디포가 가장 미국스러운 유통체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무지막지한 장비의 크기와 다양성에 정말 감탄하게 된다. 집을 수리할 일이 많지 않은 한국인들은 다이소를 통해 집 내부를 꾸미고 가꾸는데 신경쓴다면 미국 사람들에게는 홈디포가 다이소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많은 경우 급하게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가지만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들러서 다이소 꿀템을 건져오는 것처럼 홈디포는 미국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칱투해있다. 집에서 생기는 웬만한 문제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홈디포가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는다. 

 

멜로멜로라는 디저트를 먹었는데 기가막히다. 코코넛베이스의 푸딩같은 디저트인데 일본의 푸딩과 다르게 느끼하지 않다. 코넛맛이 정말 기분좋게 있어서 약간 베지밀 두유같으면서 너무 달지도 않고 느끼하지도 않은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맛과 식감이었다. 망고+빙수, 코코넛+푸딩, What's Next?라는 생각이 들게할 정도로 시장성이 충분한 아이템이었다. 강남에 누군가 차릴법도 한데 왜 아직도 한국에 안 들어왔는지 궁금하다. 강남역 대만 닭다리 튀김 팔던 곳에 멜로멜로 들어오면 훨씬 잘 될 것 같다. 

 

중국 요리를 먹었다. 킹크랩을 세일해서 옆 테이블에서 킹크랩을 시켜먹는데 정말 맛있어보였다.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베이스 소스가 비슷해 먹다보면 물리는 느낌이 약간 있긴했지만 양이나 맛에서 중국 식당은 넘보기 힘든 가성비를 자랑한다. 

 

 

그리고 Taco Again(Naturally)

 

 

About Warehouse

코딩을 해본 사람이라면 코드를 짜는 시간보다 디버깅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써본 경험이 한 번쯤 다들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났을 때의 허망함은 말로 다 담아내기 어려운데 이런 영역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창고 관리 업무이다. 우리가 창고관리업무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데 창고 관리 업무의 꽤 많은 시간이 없어진 물건을 찾는데 쓰인다. 창고에서 도대체 어떻게 물건이 없어지냐고 물을 수 있는데 무수히 많은 물건과 사람이 오고가는 창고에서 처음에 입고해놓은 물건이 다른 위치에 가있는 경우는 부지기수이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보면 이 물건이 어디로 가게 되었는지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매뉴얼대로 착착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정말 그렇다. 문제는 현실에서 그 매뉴얼이 100% 지켜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이렇게 물건이 사라지면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런 물건을 본 적이 있냐, 마지막으로 만진 것이 언제냐를 하나하나 대조하며 물건을 찾아야한다. 넓은 창고를 뒤지며 이 물건을 찾는 일은 꽤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들어올 때 제품을 다 바코드로 스캔하고, 나가는 제품들에 다 송장번호를 부여하지만 정말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창고 내 활동들은 전혀 트래킹이 되고 있지 않은 이 상황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창고를 위에서 조감하듯이 촬영하면 물품의 이동로그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창고마다 CCTV는 다 설치되어 있으니 이 영상에서 입출고 기록만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마치 축구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모아보듯이 창고 내에서 이뤄지는 활동들을 촬영하면 이를 트래킹할 수 있는 로그로 변환시켜주는 서비스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이런 아이디어를 현장에 있는 분들께 이야기했을 때는 너무너무 필요한 솔루션이라는 답을 들었다. 예전에 고객 인터뷰를 할 때 느껴보지 못했던 열렬한 반응이었어서 문제는 잘 짚어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AI와 관련된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LLM 등 다양한 AI 분야 중에서 Vision 영역이 돈이 가장 잘 될 것 같다. Moravec의 역설이 있다. 쉬운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은 쉽다는 기술 영역의 오래된 역설인데 걷기, 보기와 같이 인간이 수행하는 단순한 행위들이 오히려 기술적으로 개발 난이도가 훨씬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서 별에별 기술이 다 등장하는데 아직도 병아리 감별은 사람이 하고, 박스 세기는 사람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쉬운 영역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보는 것"이다. 보고 판단하기, 이것은 인간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지만 기계에게 시키기 매우 까다로운 종류의 일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기계처럼 부려먹어왔다. 그리고 AI가 사람을 대신해 산업 현장에 투입된다면 이렇게 인간이 기계처럼 사용되던 곳에서부터 투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대충 이런 생각이고 간만에 좋은 문제를 찾은 것 같아 열심히 파보려고 한다. 이 문제에 공감하는 분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주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