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보빙사 EP15 - My time will yet come
미국에서는 친구들끼리 어떻게 놀까? 이번 주 두 곳의 모임에 초대받아 놀러가게 되었다.
한 모임에서 친해진 분이 저녁 모임에 초대해줘 놀러가게 되었다. 다들 운전하고 다니는 LA에서 어떤 식으로 파티가 진행될지 궁금했는데 일단 각자 마실 술과 음료를 가져오고 피자같은 음식을 시킨다. 그러고서 비디오 게임을 하는데 Jack Box라는 게임을 처음 해봤다. 이게 참 신박해서 한국에서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비디오 게임인데 모바일로 참여하는 게임이다. 모바일에서 Jackbox URL로 이동해서 채팅방 코드를 입력하면 간단한 모바일 웹 게임이 시작된다. 퀴즈, 스피드게임, 마피아 게임 비슷한 게임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스마트폰에서 보이는 질문에 대한 신박한 답을 써내는 게임이었다. 모든 사람이 답을 제출하면 같이 화면을 보면서 제출된 답 중 가장 재밌는 답에 투표를 하는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런 게임과 비슷한 게임 몇 가지가 있었는데 처음 하는 사람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렇게 게임을 하고나서는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하는 카드에 대한 질문 보고 답하는 게임을 했다. 많은 파티에 다녀본 것은 아니라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모이는 자리에 보드게임을 항상 빼놓지 않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보드게임이나 카드로 하는 게임 같은 경우에 플레이어의 실력보다 운이 영향을 미치는 비중이 크기에 덜 경쟁적으로 즐기며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다른 모임은 크리스마스 파티겸 생일파티였는데 장소가 이색적이었다. 물류 창고가 모여있는 곳의 한 물류창고에서 진행되었다. 파티에 포스터도 있었는데 포스터에 장소가 Warehouse로 적혀있어 내가 아는 Warehouse가 맞나 싶었는데 정말 Warehouse였다. 전혀 파티를 할 것 같지 않은 장소였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고에 짐들이 한쪽으로 놓여있고 TV와 음악, 음료와 음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음식은 타코 케이터링이 되어 플레이트를 집어들고 뷔페처럼 이동하면 준비된 음식들로 타코를 만들어주는 식이었다.
파티임에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는데 말 그대로 남녀노소였다.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도 있었고(파티가 열리는 장소 한 가운데는 박스로 만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내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나이드신 분들도 몇 분 계셨다. 나이에 구애 받지 않고 모여서 떠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다양한 연령대가 모이는 자리는 돌잔치나 환갑잔치같은 가족행사이고 그럴 경우 주로 어른들을 중심으로 행사가 설계되다보니 지루한 경우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딱 내 또래 나이를 중심으로 행사가 준비되고 그에 어른들도 맞추고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인터랙션은 한국에서 생소하다보니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고 나중에 한국에서도 꼭 이런 이벤트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느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많다면 우리의 삶이 덜 외로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친구들도 내가 느낀 신선한 충격을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래는 미국과는 조금 상관 없을 수 있는 이야기. 조성진이 LA 필하모닉과 협연을 하길래 공연을 보고 왔다. 인생 첫 클래식 공연으로 조성진의 공연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 큰 마음 먹고 질렀다. 한국에서는 티켓이 저렴한 대신 경쟁이 치열하다면 여기는 값이 비싼 대신 표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윔블던 티켓의 일부는 현장에서만 살 수 있게 하는 영국처럼 전통을 중시하거나 공공성이 강조되는 것도 아닌데 한국에서 이렇게 가격을 설정하게 만드는 압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참 궁금할 때가 많다.
한국에서보다 배로 비싼 티켓 값때문에 구매하고서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소비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 말하자면 세상에 돈을 아끼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성진 콘서트이다. 기회가 되는대로 보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졸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전날 잠도 푹자고 저녁도 간단히 먹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공연은 2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1부 조성진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이후 지휘자로 나선 주빈 메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가 지휘하는 2부 말러 교향곡 1번을 열심히 파게 되었다.
지휘자 주빈 메타가 입장했다. 올해 나이 87세인 그는 들어올 때부터 지팡이를 짚고 와 지휘자석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 지휘를 했다. 의자에 올라갈 때 휘청거리기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87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럽게 느껴졌다. 그 나이에는 정말 즐겁지 않으면 일을 하지 못할텐데,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참 부러웠다.
뒤이어 조성진이 무대로 들어서는데 실제로 본 그는 정말 소년같이 생겼다.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더 왜소했고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은 더욱 그를 소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 시작되는데, 첫 터치를 듣고 감탄사가 나왔다. 그리고 공연장에 있는 다른 객석에서도 나와 비슷한 전율을 느낀 것을 정.말.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간드러지게 피아노를 치는지, 기가 막혔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 잘 파악해서 간사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난 번 재즈 공연에서도 느꼈지만 좋은 창작자는 감상자들과의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줄 안다. 느슨하다 싶으면 팽팽하게 조이고, 너무 팽팽한 것 같으면 적당히 풀어주는데 조성진은 훌륭한 창작자였다.
그가 이를 위해 이용하는 여러 방법이 있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은 다이나믹스였다. 타건의 세기를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하는지를 다이나믹스라고 한다던데 조성진의 다이나믹스는 어마어마했다. 몰아붙이다 움츠러들고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며 청중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데 이런 그의 강점이 잘 표현될 수 있는 부분들에서는 모두가 숨죽이고 그의 피아노 소리에 집중했다. 그 때는 정말 다른 어딘가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피아노를 칠 때 뿐만 아니라 치고 나서의 잔음도 연주의 일부분같았다. 건반에서 건반으로 손가락이 옮겨가는 그 사이에 있는 소리들에도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1부 공연이 끝나고 이 사람이 굉장히 무겁고 어두운 음악을 연주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약간은 무뚝뚝할 정도의 딱딱한 음악을 연주한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해낼지 궁금했고 그래서 클래식 애호가들이 나이가 들면 브람스를 듣게되는 것인지 그 마음이 짐작되었다.
슈만의 공연을 마치고 조성진은 너무 귀엽게 걸어나갔다. 뚝딱거리듯 인사하는 모습에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는게 느껴졌는데 이런 사람이 피아노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슴 졸이게 만들고 들끓게 만든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말러, 박찬욱이 헤어질 결심의 OST로 쓸 정도로 사랑한다는 작곡가였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었다 .뭔가 장대하고 웅장한 느낌이 있어 영화음악스러운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이 약간은 통속적이라 느껴졌었다. 이번 기회에 열심히 말러를 파보자 생각했는데 그렇게 나는 또 한 명의 말러리안이 되었다.
이 곡에 대한 설명을 찾다가 한 블로그에서 말러가 남겼다는 이 곡에 대한 해제를 보게 되었다. "이 교향곡은 한 영웅을 주인공을 설정하고, 그가 겪는 삶과 고뇌, 운명과의 치열한 싸움과 패배를 묘사하였습니다. 고뇌하는 거인은 삶의 험한 파도에 수없이 강타당하며 마침내 죽음을 맞지만 그 의지는 승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이 곡에서 사용한 주된 멜로디를 그의 다른 작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에서 따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말러가 삶과 고뇌, 운명에 대해 다루고자 했을 것 같다. 교향곡의 1악장의 1주제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 "아침 들을 거닐면"의 선율로 시작한다. 금관악기들이 굉장히 모호한 소리를 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요세미티에서 골짜기 사이 펼쳐져 있던 들판을 보며 사후세계를 보는 것 같았던 신비로운 느낌과 비슷하다. 그렇게 시작해서 굉장히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가 계속되는데, 여기서 말러의 매력이 있다. 굉장히 화사하고 신나는데 알 수 없는 불안이 있다. 살짝만 어긋나도 뭔가 잘못 흘러갈 것 같은 묘한 긴장이 흐른다. 마치 이 행복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계속해서 서려있는데 지옥이 표제였던 4악장에서 1악장의 일부분이 나오는 것은 이 불안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박찬욱이 말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올드보이에 나오는 벽에 걸린 그림의 오묘한 표정처럼, 친절한 금자씨의 엔딩에서의 이영애의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 등 박찬욱은 인물이나 사건을 그려낼 때 입체적이며 복합적이게 그려내는데 그것이 말러가 곡을 그려낸 방식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또한 말러 교향곡의 3악장의 뜬금없지만 잘 어울리며 위트있는 시도들은 박찬욱 영화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유머코드와 비슷했다. 영화 <아가씨>에서 숙희가 나무에 매달린 아가씨를 붙잡고 있다가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아가씨를 놓치고 아가씨가 발버둥치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 사람을 피식 웃게끔 만드는데 극중설정에 아주 능청스럽게 맞아떨어져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듯한 시도들.
3악장 중간에 장송행진곡 멜로디와 공연장의 조명에 취해 정말 생각을 놓고 감상하는데 연주자들이 꼭 장례 미사를 진행하는 신부같아보였다. 초콜릿 포장지같은 노란 불빛이 아른거리며 말러 3악장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림이 떠오르는데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4악장. 내가 들은 한 팟캐스트에서는 이 4악장의 전개를 Delayed Gratification이라 표현했는데 정말 딱 맞는 표현이었다. 이 악장의 표제 <지옥에서>답게 정말 어둡고 절망적인 멜로디로 시작하는데 개선되는듯하다가 다시 추락하고 이 과정을 몇 번을 반복한다. 말러가 우리가 살면서 겪게되는 Struggle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는데 정말 그런 느낌을 주는 악장이다. 그렇게 끝날 듯 끝나지 않던 지옥은 결국 끝이 난다. 마지막에 말러는 Delayed Gratification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는데 이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정말 말러의 교향곡 전체를 들어야지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서 교향곡의 형식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감동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경험을 하며 역시 직관이 좋다는 것을 느꼈다. 야구 경기가 TV로 볼 떄는 길게 느껴지는데 경기장 안에 있으면 딱 필요한 시간만큼 경기에 쓰인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클래식 곡들도 직접 감상했을 때, 적어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납득이 되었다. 또 실제로 보니 들을 것뿐만 아니라 볼 것도 많아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지휘자를 보다가 메인 선율을 연주하는 연주자를 보다보면 오히려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왜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클래식 음악에 열광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남들이 좋아하는데 내가 이해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처럼 직접 경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달리 공명하는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들이 있다. 이 사람이 무슨 말하는지 진심으로 알겠고 뭔가 통하는 느낌이 있는 사람들말이다. 스무살 초반에 한 영상에서 본 30년 비전을 이야기하던 손정의가 그런 사람이었고 나에게 미국을 가라고 이야기해주신 첫번째 회사의 대표님, 가수 이상은, 영화감독 박찬욱 등등 여러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말러도 그 중 한 명이 되었다.
거듭되는 좌절과 시련에도 결국 환희와 승리로 끝마치는 이 곡을 감상하며 말러의 자기선언적인 곡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의 시대는 올 것이다"라고 말한 이의 희망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얼마 전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분으로부터 윤기 씨는 35살에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지금이 아니고 35살인지, 그 시간이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져 막막했는데 말러가 남긴 "My time will yet come"으로 승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시대도 분명히 온다.
많은 작곡가들이 9번 교향곡의 저주를 피해가지 못했다고 한다. 말러도 그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한 곡을 작곡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당대의 평균 수명과 작곡가의 나이를 생각하면 저주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한 인간이 인생에 남길 수 있는 창작물이 몇 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야속한 자연의 섭리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게 맞지 않을까. 이는 몇 주 전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보며 영화 감독이 남길 수 있는 작품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우쳤을 때와 비슷한 긴장감을 준다. 나는 다가오는 나의 시대를 어떻게 열 것인가, 부지런히 고민하고 행동하며 살아야겠다. Life is short.
월트디즈니홀 주변은 압구정 갤러리아 사거리랑 느낌이 비슷하다. 지나다나기 무서운 DTLA에 이렇게 깔끔하고 부티나는 곳이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대비된다.
미국에서는 10월은 할로윈, 11월은 추수감사절, 12월은 크리스마스라는 굵직한 기념일들이 있는데 이 때마다 소매점들이 부지런히 새로 살 것들을 가져다놓는다. 매장 분위기도 시즌에 따라 바뀌고 관련 상품들 특히 집 안팎을 꾸밀 수 있는 물건들을 많이 가져다 놓는다.
마트에서 발견한 북한 냉면. 선글라스가 김정남이 쓰던 것과 비슷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