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보빙사 EP17 - Route66
기대하던 연말 일정이 있었는데 어려워졌다. 새해를 어디서 맞이할지 고민을 하다 그랜드캐넌을 가기로 했다. 그랜드캐넌에서 말러 2번 교향곡 5악장을 들으며 일출을 보면 아주 근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만의 연휴였기에 그랜드캐넌만 들리기에는 아쉬워 다른 곳을 포함해 일정을 짰다. 같이 가는 일행 중에 이미 그랜드캐넌을 다녀온 분들이 있었기에 LA에서 그랜드캐넌을 갈 때 자주 가는 길이 아닌 다른 루트를 택했다. Route 66을 따라 애리조나를 지나 세도나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사실 세도나는 새로운 루트를 궁리하며 애리조나의 여러 도시를 검토하다 볼거리가 있어보이고 동선도 맞아 선택한 도시였다. 그런데 세도나를 여행지로 정하고 찾아보니 여기가 무슨 영험한 땅으로 여겨지는 곳이라 한다. 예전부터 인디언들이 신성시하던 땅이고 지구에서 자기장이 가장 센 곳이다, (그래서 나무가 휘어진다는 글도 봤는데 나무는 부도체인데 어떻게 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Vortex가 흐르는 곳이다 등등 우리나라에서 "기"가 좋다고 하는 곳들에 붙을법한 설명이 붙는 동네였다. 그래서 명상이나 뉴에이지, 기타 신비한 경험을 체험하기 위해 들리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한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나니 한 해를 마무리하기 정말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간 Route66는 시카고에서 LA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동, 서부를 연결하는 미국 최초의 횡단 도로라 한다. Route 66을 대체하는 다른 도로들이 생겼지만 이동하는 내내 곳곳에서 Route66이 적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Route 66은 미국 대공황기를 그려낸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이주민들이 서부로 이주할 때 이용했던 도로이기도 하고 저항적인 청년 문화, 비트세대를 가장 잘 그려냈다고 평가받는 소설 <길 위에서>의 주인공이 여행했던 길이기도 하다. <길 위에서>는 나에게 오아시스를 알려주고, 락 음악의 역사와 계보를 설명해주며 내 안에 락스타를 심어줬던 친구가 꼭 읽어보라 했던 책이기에 감회가 특히 남달랐다. 이런 역사가 있는 도로여서 그런지 가는 길에 수상해보이는 가게들을 많이 봤다. 누가봐도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것 같은 간판과 설명이 적혀 있는 가게들이었다.
애리조나에 들어서며 이 땅의 광대함을 시간과 공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시간대가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애리조나는 캘리포니아보다 한 시간 빨랐는데, 이 시간대의 변화가 비행기에서는 하늘에 떠있는동안 이뤄지다보니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경험하니 다른 풍경들은 연속적인데 시간만 바뀌는 모습이 꽤나 낯설었다. 한 나라에 여러 시간대가 있는 것을 몸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애리조나의 경관은 캘리포니아와 확실하게 구별되었다. 제일 확연하게 달라지는 부분은 선인장이었다. 애리조나 주 경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가 아는 모습의 선인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도 조슈아트리를 비롯해 몇 곳의 사막이 있고 갈 때마다 선인장을 보긴했지만 우리가 아는 길쭉한 형태의 선인장은 아니었다. 애리조나에 들어서자 그런 선인장들을 볼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볼 수 있었던 풍경은 선인장이 잘 어울리는 척박하고 황량한 풍경이었다. 이런 동네에서 살면 무슨 재미로 살까. 차가 없으면 정말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갔다. 애리조나에 들어서니 픽업트럭의 비율이 현저히 높아져 미국 내 차량 판매 1위가 픽업트럭인 것이 실감났다. 그리고 RV 차량이 자주 보였는데 정말 캠핑용도인 것인지 아니면 주택을 대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지나가다 보면 가보지 못했지만 호주의 아웃백에 있는 울룰루와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바위를 볼 수 있었는데, 이런 풍경들을 볼 때면 해외 여행을 나가본 미국 사람들이 적은 이유가 이해가 된다. 맘모스 마운틴을 보면서 알프스가 비슷한 느낌이겠다고 생각하고 애리조나의 바위들을 보며 호주의 아웃백도 비슷한 느낌이라 생각할 것 같다. 주에서 주로 이동하면 거의 국가가 달라지는 것만큼 경관이나 풍토가 달라지다보니 미국 내 여행으로도 충분하다 느낄 것 같다. 미국 내 국립공원을 1년에 1개씩만 가도 60년이 걸리니 나갈 이유를 못 느낄만하다.
가는 중간에 한 식당에 들렀는데 애리조나의 느낌이 확 온다. 일단 가게에 동물의 머리가 걸려있고 체크 셔츠와 카고팬츠를 입은 아저씨들이 둘러 앉아 버거를 먹고 있다. 버거를 써는데 허리춤에 찬 칼집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 버거를 자른다. 버거는 별 특별하지 않은데 맛있는 맛이었다. 패티가 두툼했는데 육향이 많이 느껴지는 담백한 맛이었다. 버거를 주문하면 칩과 음료가 제공된다. 한국에서는 서브웨이만 이런 식으로 감자튀김 대신 칩을 제공했던걸로 기억하는데 미국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들 중에서는 이런 식으로 칩으로 감자튀김을 대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 사람들의 식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공산품과 수제품을 구분하지 않는 모습의 한 예다.
메뉴 중 Swiss 이름이 들어가는 버거가 있어 시켜봤는데 버거 번 대신 호밀빵이 들어가있다. "호밀빵"이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럽스러운 식재료 중 하나인 것 같다. 캘리포니아에 인기 있는 빵집 중에 European Style Bakery를 표방하는 곳들이 종종 있는데 가보면 한국에서 식사빵이라 불리는 호밀빵, 캄파뉴, 치아바타와 같은 빵을 팔거나 패스트리류를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뒤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체격 좋은 아주머니가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가면서 서부 영화에 나오는 카우보이들처럼 이쑤시개를 입에 끼고 윙크를 하며 나가셨다. 일행이 식당에 있는 주크박스에 돈을 넣고 음악을 틀었는데 음향이 형편없다.
도로 환경도 확연히 다른데 애리조나에서는 회전 교차로를 자주 볼 수 있다. 이 곳에서는 거의 5마일에 한 번씩은 회전교차로가 나온다. 시카고 여행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따로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새로운 모습이었다.
차를 몰아 세도나에 들어서는데, 정말 장관이다. 황무지가 계속 이어지다가 갑자기 원시시대에 들어선 느낌을 주는 엄청난 크기의 바위와 수풀이 펼쳐지는데 모르는 사람이 와도 신성하다고 느껴질법한 풍경이다. 왠지 좋은 기운이 있을 것 같은 붉은색 흙이 곳곳에 깔려있고 건물들도 흙과과 조화를 이루는 색깔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도시가 정말 색깔을 잘 쓴다고 느낀 점이 황토빛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키 컬러가 파란색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연유에서 파란색을 사용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문득 놓치고 있는 주변 환경을 자각했다. 세도나의 하늘은 구름한점없이 맑고 청명했다. 곳곳에 있는 붉은색이 너무나 선명해 놓치게 되는데 사실 세도나에서는 파란 하늘이 어디에서든 함께하고 있었다. 그래서 붉은색 계열인 도시 경관에 파란색이 키 컬러로 사용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 신안에 있는 보라색 섬을 뉴스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뉴스를 통해서만 봐도 부자연스러운 보라색으로 도배된, 김호중 팬클럽이 아니고서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그런 보라색 섬을 기획한 관계자에게 세도나 연수를 시켜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세도나가 매력적인 부분은 원초적인 자연 풍경과 함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 서부나 남부, 역사적으로 늦게 개척된 도시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격자형 도시 구조가 자연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세도나는 미국 사람들이 안해서 그렇지 한다면 한다고 뽐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지역성이 두드러지는 미국에서의 여행에서 재밌는 즐길거리 중 하나는 각 지역의 술이다. 지난 시카고 여행에서 로컬 브루어리의 매력에 푹 빠진 뒤 로컬 브루어리가 있으면 꼭 들리는데 이번에는 로컬 위스키 증류소를 방문했다. Redwall Distiliery라는 증류소인데 세도나의 붉은빛 바위가 보이는 언덕에 자리해있었다. 마침 수상한 버번 위스키가 있기에 별 고민 없이 선택했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LA, Originally from Korea라 답하자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한국 음식이란다. 종이백에 술을 넣고 근처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샀다.
세도나에 있는 홀푸즈도 도시 경관과 잘 어울러졌다. 다음 날 방문한 세도나의 관광 명소로 유명한 블루 맥도널드보다 이 홀푸즈가 더 인상깊었다. 장을 보고 나오는데 내가 다니는 체육관의 친구들을 만났다. 이 넓은 땅에서 어떻게 조율도 없이 같은 곳, 같은 시간에 있을 수 있는걸까? 인간사의 확률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바라본 밤하늘에는 별이 빽빽하게 차있었다. 하늘이 얼마나 넓은지 알려주겠다는 것처럼 별들이 하늘 곳곳 구석구석 흩뿌려져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매번 보던 밤하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저녁을 준비했다. 미국에서 여행다니면서 오븐의 유용함을 알게 되었다. 고기와 야채를 넣고 중간에 한 번 뒤집어주는 정도로 구우면 그럴싸한 식사가 완성된다. 보드게임과 위스키, 아이스크림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블루 맥도날드를 보고 그랜드캐넌으로 향했다. 그랜드캐넌으로 가는 길에서 애리조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겨울이 어울리는 동네에서 볼 수 있을법한 길쭉길쭉한 나무가 도로 양옆으로 즐비하고 멀리 눈 덮인 설산이 보이는 풍경이었다.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 고도가 높아지니 기온도 낮아져 겨울의 풍경을 닮게 된 것이었다. 가는 길에 스키 렌탈샵을 볼 수 있었다. 애리조나와 스키,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두 이미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랜드캐넌 가는 길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꾸며놓은 것 같은 식당에 들렀다. 밤에 보면 무서울 것 같은 영혼없어보이는 공룡 조형물들 사이 동굴같은 외관을 가진 식당 겸 휴게소였다. 아마 공룡 화석이 나왔던 곳인 것 같다. 가게에서는 간단하게 피자를 시켜먹었는데 팔고 있는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랜드캐넌 주변에는 식당이나 식료품점이 별로 없는데 제한된 공간에서 정말 필요한 것만 팔아야하는 이 곳에서는 어떤 것을 팔고 있는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피자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그랜드캐넌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랜드캐넌 로스터리라는 곳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미국에서는 이런 관광지에 뜬금없이 맛집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온도와 원두 양을 철저하게 맞출 것 같은 아저씨가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데 정말 군더더기 없이 맛있는 맛이었다.
에스프레소로 충전하고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 그랜드캐넌 전망대로 향했다. 첫 모습을 바라보는데 정말 웅장하긴한데 전날 세도나의 감동때문인지 극적이지까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이런 모습을 보며 이제는 정말 덜 놀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충분히 좋은 것들은 많이 본 것 같다. 이 때 덜 소비하고 더 창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캐넌의 트레일을 따라 걸어내려갔다. 절벽을 따라 나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트레일이었는데 중간중간 표지판에 고저차가 심해서 고산병에 걸릴 수 있으니 하루에 너무 많은 일정을 소화하지 말라는 경고가 붙어있었다. 트레일이 시작되는 곳에서 말을 봤는데 이 곳은 차가 못 다니니 노새를 타고 다니는 것 같았다. 트레일 중간 중간 노새 똥을 볼 수 있었다. 그랜드캐넌이 너무 커서 트레일을 따라 내려갈 때는 벽이 주로 보이다보니 역설적이게 그 규모가 잘 안 와닿았다. 중간 중간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에서 그 크기를 가늠할 뿐이었다. 찾아보니 우리가 시작한 사우스림에서 콜로라도 강을 건너 노스림까지 가는 트레일 코스가 있다는데 그 코스는 한번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랜드캐넌은 처음에는 전혀 우리가 아는 그랜드캐넌이 안 나올 것 같은 풍경이다가 딱 전망이 펼쳐지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그랜드캐넌의 위이기 때문이다. 그랜드캐넌의 평평한 윗부분 위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걸 뚫고 지나가면 우리가 아는 그랜드캐넌의 뷰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랜드캐넌의 광대함을 느꼈던 순간은 전망을 바라봤을 때가 아니라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캐넌의 윗부분 평평한 땅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돌아오는 길에 2023년의 마지막 노을을 봤다. 이렇게 또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방향성을 정하고 꾸준히 기록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다 휘발되고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캐넌을 걸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10년을 바라보며 꾸준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숙소에 도착해 저녁을 준비했다. 부르고뉴 와인없는 부르기뇽과 폭립, 샐러드, 소세지와 야채를 먹었다. 마트에서 산 그랜드캐넌 브루어리의 맥주를 종류별로 마셨다. 저녁을 먹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의 관심사, 취향이 극명하게도 달랐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사연을 털어놓는 순간이 생겼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묘사된 순간같았다. 예전에는 <드라이브 마이카>가 지루한 영화라 생각했는데 이 순간을 2~3시간 남짓의 영화를 통해 보여줬다는 점에서 실로 놀라운 영화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려고 TV를 트는데 생각해보니 뉴욕은 이미 새해가 밝았고 LA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한국의 경인방송처럼 애리조나 지역만 보여주는 라이브 뉴스가 없나 케이블 채널을 둘러보는데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전세계의 새해 불꽃놀이를 중계해주는 방송 채널이 있어 런던, 시드니 등등의 불꽃놀이를 보며 새해 카운트다운을 했다. 그렇게 2024년이 밝았다.
2024년의 마지막 곡으로 백현진의 <모과>를 듣고 첫 곡으로 이랑의 <난 왜 알아요>를 들었다. 둘 다 내게 너무 소중한 순간을 떠올려주는 곡이어서 곡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늘어난다는 노랫말이 나의 한 해를 잘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환란의 세대>를 듣는데 이 곡이 지독한 사랑의 노래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환란의 세대를 살고 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그랜드캐넌으로 일출을 보러 출발했다. 도착시간까지 약 30분 정도 남았을 때, 말러 교향곡 2번 5악장을 재생했다. 도착하니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착했을 때쯤에는 멀리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며 그랜드캐넌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감상하고 싶어서 자리를 옮겨 하늘과 그랜드캐넌, 말러를 감상했다. 2번 5악장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합창이 나오는데 심히 감상적인 평임을 알지만 정말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이 솟구치는 감정을 두고두고 간직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태양의 본체는 보지 못했지만 충분했다. 차를 돌려 나오는데 사슴 네 마리를 봤다. 전날에도 사슴이랑 산양을 봤는데, 이 날 본 사슴 네 마리는 느낌이 달랐다. 분명 길조다. 차 아주 가까이 창문까지 와서 눈을 마주치고 가는데 2024년의 일진이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대했던 이벤트 중 하나인 그랜드캐넌을 바라보며 컵라면 먹기를 했다. 가는 길에 콜로라도 강이 보이는 곳에 벤치가 놓여 있어 자리를 잡고 컵라면과 맥심 커피를 마셨다. 그랜드캐넌을 두고 육개장과 맥심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미국땅에서 사업으로 돈 벌겠다는 내 다짐을 비유적으로 찍어낸 모습이기도 했다. 사슴과 컵라면, 맥심. 2024년에는 아주 크게 될 예정이다.
오는 길에는 피곤해서 계속 잠만 잤다. 중간에 Kingman이라는 도시에 들러 Route 66의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렀다. 전형적인 미국식 아침과 식사 메뉴를 파는 곳이었다. 키치한 색깔과 장식들로 꾸며져있었고 관광객을 오래 상대해왔다는게 느껴지는 소품들이 있었다. 빈티지를 흉내낸 빈티지였다. 오믈렛을 시키고 해시브라운, 팬케이크, 비스킷을 시켰는데 양이 굉장히 많다. 이 곳의 유명한 메뉴가 홈메이드 루트비어라는 글을 봐서 루트비어에 아이스크림을 올린 음료를 시켰다. 루트비어는 가스활명수랑 맛이 비슷한데 처음 가스활명수 만들 때 이 루트비어를 참고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문을 받으신 아주머니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는데 꽤 오래 전 찍은 것 같은데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 그리고 묘하게 그 아주머니에게 맞춰진 포커스때문에 놀라운 TV 서프라이즈에서 "진실!"하고 나올 때 첨부되는 사진같아 보였다. 나오는데 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뒤에 비친 햇살과 이 식당의 키치한 인테리어와 정말 잘 어울러져 K-POP의 뮤직비디오같아 보였다.
아주 오래된 기계로 운영되는 동네 주유소에서 주유하는데 바이든 사진이 붙어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주유소의 주인은 아주 열렬한 트럼프지지자여서 계산하는 곳은 온통 트럼프 사진과 구호로 도배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주유소에 바이든 스티커를 붙이고 간 사람의 위트가 재치있다고 생각했다. 주유소 앞에 특이하게 태국음식점이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이 Route66에서 태국 음식점을 차리게 된 걸까? 가게에 엘비스 프레슬리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미국스러운 빈티지 느낌을 낼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엘비스 프레슬리인 것 같다. 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면 그 시대의 미국이 떠오르는걸 보면 정말 아이코닉한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애리조나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려진 태국 음식점을 마지막 기억으로 오는 내내 거의 잠만 잤다. 좋은 기운을 얻고 온 새해의 Route66이었다. 나와 세상 모든 쿵야에게 이 좋은 기운이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