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nksgiving Day 연휴에 갈만한 곳을 찾다가 별 생각없이 시카고를 찾게 되었다. 워낙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누군가에게는 인생도시라는 얘기를 듣기까지 해 가보기로 했다. 연휴 기간 비싼 비행기값때문에 마지막까지도 고민했지만 속는셈치고 여행을 시작했다.
시카고에 도착한 첫날에는 유람선을 타고 지오다노 피자를 먹고 재즈바에 갔다. 예쁜 도시이지만 서울의 청계천과 을지로가 생각이 났고 이태원의 피자와 재즈바가 생각이 났다. 시카고 피자는 크러스트가 크루와상을 떠올릴 정도로 바삭하고 치즈가 훨씬 고소하긴 했지만 토마토 소스와 치즈의 조합이라는, 피자에서 상상되는 맛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시카고를 보고도 감흥을 느끼지 않을만큼 내가 자라온 서울도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오래된 건물과 거기에 담긴 철학, 그리고 주황색 가로등만 있으면 서울도 누군가의 인생도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시카고를 떠날 때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아무 곳에서나 찾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시카고가 특별하다는 것을.
첫날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안고 돌아온 숙소에서 묵고 있는 다른 게스트에게 갈만한 곳을 추천받았다. 시카고 토박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그 분은 My man을 ma~man에 가깝게 발음하는 분이었다. 실제로는 처음 들어본 그 쫀득항 억양에 살짝 당황했는데 그 분과의 만남은 그 다음날 마주하게 될 진짜 시카고의 예고편같았다. 시카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그 분은 내일 핫도그를 먹을 예정이라 하니 핫도그는 때려치우고 폴리시 소세지를 먹으라고 했다. 직접 구글맵에 제대로 된 곳을 찾았는지 확인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 분이 소개해준 핫도그를 먹으러갔다. 핫도그 가게는 6시부터 열었다. 전날밤 동네 앞 술집에서 2시까지 술을 마셨는데 2시까지 열려있는 곳과 6시부터 열리는 곳이 있는 이곳을 보며 LA에서 잊고 지냈던 도시의 기억이 떠올랐다.
핫도그 가게는 영화에서 보던 것과 같은 핫도그가게였다. 철판 위에 소세지와 양파가 구워지고 있고 집게로 소세지를 뒤집고 양파를 건져 빵에 담아줬다. 들어가는 재료는 아주 단순했다. 소세지와 양파, 머스타드 그리고 빵옆에 나란하게 놓여있는 고추였다. 이 고추를 엑스트라로 더 넣어달라고 하는, 시카고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의 주문을 보니 이 고추가 맛의 핵심인 것 같았다. 예전에 시카고 출신인 오바마가 우리의 부먹, 찍먹 논쟁처럼 핫도그에 케첩 뿌려먹는걸 용납할 수 없다는 인터뷰를 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케첩이 들어가면 안 될 맛이긴했다.
아침 시카고의 찬 바람을 맞으며 찾아간 그 곳에서 따뜻하게 배를 채우고 그 주변을 구경했다. 기생충에 나오는 일리노이~시카고 대학의 기숙사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추운 날씨에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아담하고 포근한 건물들이 놓여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떨어진 낙엽, 바람과 벽돌집들이 조화로운 모습을 만들어냈다.
돌아오는 길은 버스를 탔다. 시카고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도시이지만 버스의 운행시간은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으로 표시되어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시카고 미술관으로 가서 고흐, 모네 등 다양한 인상파 작품과 앤디워홀, 잭슨 폴록의 그림을 감상했다.
여기까지는 시카고를 찾은 많은 관광객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러 가며 시카고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미술관을 나와 우리는 시카고 현지인들이 사랑한다는 Lem’s Bar B Q라는 곳으로 향했다.
별 생각없이 지하철을 타고 식당이 있는 동네로 가는데 차이나 타운, 시카고 컵스 구장을 지날 때마다 인종 구성이 단조로워지기 시작했다. 아시아 사람 이 한 명도 없었다. LA에 캄튼같은 곳이 이렇다고 들었는데 이를 직접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시안 커뮤니티가 큰 LA와 달리 이 곳은 인종 구성이 미국 전체인구의 비율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백인과 흑인이 주를 이루고아시안은 압도적인 소수 인종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동네는 그 중에서도 흑인 커뮤니티가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는 곳이었다.
지하철 칸에서 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한마디씩 하며 지나갔다. 마치 래퍼의 시그니처 사운드처럼. 한 사람은 swag thug를 외치며 지나가는데 힙합 음악에서나 듣던 그 단어를 직접 외치며 지나가는 소리를 보는데 그 모습을 보니 힙합은 한국인이 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다발을 든 복면 쓴 사람이 지나갔다. 지하철 안에서 초콜릿을 파는 잡상인이었는데 추운 날씨로 인해 얼굴 전체를 방한 마스크로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었던터라 정말 순간 온갖 생각이 다 스쳐갔다.
역에서 내렸을 때도 아시안은 우리밖에 없었다. 흑인 커뮤니티가 형성된 지역이었다. 렘스바비큐는 문이 닫혀있었다. 심장 떨려하며 당도한 그곳이 문이 닫힌 채 휑하게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웃고 있는 우리를 특이하게 쳐다보는(그 동네에서 우리 존재가 특이해보였을거다) 동네 사람들의 눈빛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서 시카고의 명물이라는 개럿팝콘을 먹고 스케이트를 타러갔다. 개럿팝콘은 줄이 길게 서있었는데 굳이 기다려서 먹을 맛은 아니었다. CGV의 팝콘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시카고의 건물을 뒤로 한 채 열심히 스케이트를 탔다. 오랜만에 타는 스케이트에 발등과 종아리가 쑤셔오기 시작했다. 2시간을 꽉 채우겠다는 처음의 다짐과 달리 30분만 타고 나왔다. 스케이트를 못 타는 사람을 위해 붙잡고 탈 수 있는 펭귄 모양의 보조장치가 제공되는 점이 신기했다.
스케이트를 타기 전 길거리에서 시카고 모자를 샀다. 10bucks라는 말을 듣고 샀는데 LA에서 와서 보니 $100가 결제되어있다. 미국에서는 방심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시카고 여행 중에도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방심할 때쯤이면 공원을 입장하기 위해 필요한 보안검사, 건물에 쓰여있는 총기반입금지 표시 등이 경각심을 일깨워줬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격을 맞았다.
스케이트를 타고 360타워에서 야경을 봤다.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마켓에 들렀는데 미국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모습은 처음 봤다. 핫초코같은 음료와 머그컵을 함께 주는 메뉴가 가장 인기있었고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컨셉을 따와서 그런지 커리부어스트, 프레첼 등 독일 음식이 많았다. 가게는 많았지만 거의 동일한 음식들을 팔고 있었다. 한 때 한국의 지역축제가 말이 많았던 적이 있는데 미국에서는 아예 다 표준화시켜서 그와 같은 문제를 원천차단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개성을 중시하는 이 나라에서 제일 개성없는 영역은 식당들인 것 같다.
360타워에서 야경을 보고 오는 길, 지하철에는 많은 노숙자가 누워 있었다. 시카고에는 24시간 운영하는 지하철이 있는데 이 추운 날씨에 내가 노숙자여도 당연히 안에 들어와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사람들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했는데 그 답을 볼 수 있었다. 시카고 지하철에서 일하는 경비 요원들은 정말 껄렁껄렁하다. 솔직히 이 사람들하고만 지하철 타고 있으면 겁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장 불량, 태도 불량이다. 지하철에서는 자기들끼리 어찌나 크게 떠드는지. 근데 노숙자들을 깨울 때는 확실하다. Excuse me, Sir을 그루브 있게 외친 다음에는 냅다 “Brother, wake up!”을 외쳐버린다. 이 때 외쳤던 Brother가 정말 귀에 착 감겼다.
숙소로 돌아와 앞에 있는 블루스클럽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구글맵에서 별점도 높았는데 딱 문을 여는 순간 이곳에도 아시안은 우리밖에 없겠다는 느낌이 바로 들었다. 입장하는 보안 요원의 말부터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말에 넘치는 그루브감때문에 떠듬떠듬 몇 단어로 유추할 뿐이었다. 정말 너희들이 여기를 찾아온 것이 맞냐는 표정으로 들어올 것인지 물어봤다.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검보라는 남부지방에서 먹는 음식이 있길래 주문이가능한지 물어봤는데 식사 메뉴는 주문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나가 바로 앞에 열려있는 치킨집을 갔다. 그 곳 역시 아시안은 우리밖에 없었다. 흑인들의 소울 푸드라는 명성에 걸맞게 안에는 전부 흑인들이었다.
다시 돌아와 공연료를 내고 안에 들어갔는데, 펍 안이 그루브로 가득차있었다. 맛깔난 블루스리듬으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데 그냥 말 그대로 존재가 블루스였다. 노래 중간에 하는 말들도 블루스였고 무대 양옆애 서있는 댄서들의 움직임도 블루스였다. 약간 디너쇼같이 진행되는 공연이었다. 노래를 하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더 길었는데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 리듬을 탔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음악이고 어디까지가 말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즉흥이 이렇게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말에 흘러넘치는 그루브때문에 이 분이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기는 어려웠는데 어떤 사랑 노래를 부르고는 한 테이블에 결혼을 했냐고 물어봤다. 남편은 했는데 나는 안 했다는 재치있는 답변이 나와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끝날 때 다시 한 번 가수 소개를 해주는 엠씨의 말을 듣고 이 분이 90세가 다 되어가는 고령의 뮤지션이며 그래미 어워즈 2회 수상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90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에너지였고 그래미 어워즈 수상자라는 사실이 납득되는 그루브였다.
공연이 끝날 때 이 내용을 말해준 엠씨가 오늘 공연은 끝났고 언제 무슨 공연이 있고 다들 집에 조심해서 가라는 평범한 내용을 공지하는데 그 공지에도 그루브가 담겨있었다. 쇼미더머니 예선을 볼 때 항상 왠지 모를 거북함과 오그라듦을 느꼈는데 이 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온갖 공을 들여 비트를 타고 리듬을 맞추는 쇼미더머니를 보다보면 나도 힘들고 긴장이 된다. 근데 이 날 블루스클럽의 사람들은 정말 동네 마실 나가듯 리듬을 갖고 놀아 보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매우 편했다. 마치 뛰어난 운동선수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려한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음악과 음악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모든 것이 음악이 되는 느낌이었다. 공연 중에 블루스는 음악의 어머니이고, 블루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정말 경계없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카고의 둘째날은 이렇게 끝났다. 지하철 칸을 지나가며 Swag Thugg를 외치는 힙합 전사와 우연히 찾아간 블루스펍에서 그래미어워즈 수상자를 만날 가능성, 이것이 이 도시가 가진 매력이었다.
이틀간 시카고 다운타운을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에 셋째날은 편한 마음으로 올드타운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이 날에 대한 큰 기대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셋째날 우리는 시카고의 나머지 절반을 볼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나와 시카고의 글로벌 메뉴 맥도날드로 갔다. 각국의 맥도날드에서 먹을 수 있는 글로벌 메뉴를 파는 곳이었는데 우리가 간 날은 캐나다, 스페인, 한국의 메뉴를 맛볼 수 있었다. 품절이었던 한국의 메뉴를 제외하고 캐나다의 맥머핀과 스페인의 맥팝스를 시켰다. 캐나다의 맥머핀에는 매콤한 스리라차 비슷한 소스가 들어가는 점이 특이했고 스페인의 맥팝스는 던킨도너츠에서 파는 먼치킨 도넛과 비슷한 맛이었다. 둘 다 특별한 것은 없는 맛이었다.
글로벌 메뉴 맥도날드가 있던 동네는 건대입구의 분위기랑 비슷했다. 고가도로와 힙해보이는 카페와 상점들이 성수동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하지만 북적대지 않았고 거리가 훨씬 넓직넓직했다. 이런 곳을 볼 때면 한국사람들에게 넓은 땅이 주워졌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분명 한국인의 미적감각이라면 이 거리를 훨씬 예쁘고 다채롭게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올드타운으로 갔다. 시카고 스타일 스탠드업 코미디가 있다길래 보려고 했으나 티켓이 매진되어 볼 수 없었다. 거리로 나와 올드타운을 걸어가는데 토요일 낮인데도 펍에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전날 미국의 펍에 실망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Lem's Bar B Q가 문을 닫아 다운타운에 있는 펍에서 바베큐를 시켜먹었는데 시카고 스타일과 캔자스 스타일 중에 고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시켰는데 맛의 구별이 어려웠다. 그냥 미국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바베큐와 소스맛이었다. 개성없는 미국 식당들이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사람들이 꽉 차있는 모습을 보니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맛있다고 생각하냐고. 한국의 술집에서 파는 전, 순두부 찌개도 뭐 식당마다 맛이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메뉴를 만든다거나 적어도 재료를 가지고 조리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한국에서 본 식당들의 모습인데 여기서는 그냥 있는 재료를 구색을 맞춰 내놓는 것만 하는 식당들이 정말 많다.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불평불만을 실컷 털어놓으며 근처에 있는 링컨파크로 갔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별 생각없이 향했던 링컨파크였지만 이곳은 시카고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미시간호수는 시카고를 자꾸 항구도시로 착각하게 만들만큼 큰 호수이다. 전세계 민물의 1/5이 미시간호수를 포함된 오대호에 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링컨파크에 있는 둔치는 이 미시간호수를 느끼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호수는 바다와 달리 정말 고요하고 잔잔했다. 같은 파도여도 바다의 파도처럼 거칠지 않고 잔잔하고 평온하게 일렁였다. 그 일렁임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어서 가만히 보고 있있으면 끌려들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호수의 물빛은 정말 선명한 에메랄드 빛이었고 시카고의 차가운 하늘빛과 정말 잘 어울렸다. 날씨가 점차 개기 시작하던 때라 호수 먼 곳에서는 하늘이 태양빛을 머금고 바다와 비슷한 채도의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과 호수를 한참을 바라보다 시선을 점차 오른쪽으로 옮기다보면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시퀀스가 정말 환상적이었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어떤 건물을 설계할 때, 건물에 들어가 처음 만나는 공간에서는 제한적인 풍경만 보여주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마지막에 전체 풍경을 볼 때 감동을 느낄 수 있게 설계했다고 했는데 링컨파크에서 바라본 시카고의 풍경은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 한참을 앉아 그 넋놓고 그 풍경을 감상했다.
호수 감상을 마치고 올드타운에 있는 한 바베큐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곳은 정말 우리가 상상하던 미국의 분위기가 녹아있는 식당이었다. 벽돌집 1층에 자리한, 밖에서는 영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두꺼운 문이 있는 식당이었다. 식당 안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식당에는 가족들이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식당 안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 입고있던 옷, 표정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느낌을 줬다. 정말 가족적인 분위기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 시킨 바베큐와 감자칩, 그리고 시금치 요리는 확실히 달랐다. 메뉴판에 써져있던대로 홈메이드의 느낌이 물씬 나는 정성이 깃든 맛이었다. 식당을 나오는데 정말 다른 세상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그 식당의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 역시 시카고에서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식당의 TV에서 미식축구 중계가 나오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날이 미국 대학교 미식축구의 빅매치가 있었던 날이었다고 한다. 오하이오와 미시건의 경기였는데 The Game이라 불릴 정도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라이벌 매치라 한다. 게다가 이번 시즌에는 양팀 모두 리그에서 1패도 없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더욱 기대를 갖고 경기를 지켜봤다고 한다. 올드타운을 지나오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아메리칸펍이 꽉 차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식사를 마칠 즈음에 미시건의 승리가 확정이 되었다. 인터뷰를 하는 미시건의 쿼터백이 너무나도 알파메일스러워서 저런 사람의 삶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봤다.
식당을 나와서는 동네를 산책했다. 여기서는 어제 갔던 동네와 다르게 백인들의 인구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박공집, 거리에 쌓인 낙엽, 철지난 할로윈 장식과 미리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장식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미국 동네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나와의 접점이 정말 없을 것만 같은 동네여서 그 풍경이 더욱 소중하고 뜻깊게 다가왔다. 정말 LA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산책을 하여 구스 아일랜드 브루어리까지 갔다. 브루어리 로고에 있는 구스 그림을 보고 링컨 파크에서 본 큰 새들이 구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카고 지도에 표기되어 있던 구스 아일랜드라는 지명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구스 아일랜드 브루어리에서 다양한 종류의 스타우트를 시켰는데 그 중 압권은 배럴에서 숙성시킨 스타우트였다. 코코넛과 월넛을 넣어 배럴에서 함께 숙성시켰다고 하는데 처음 받았을 때 와인이 나왔나 싶을 정도로 색깔이 진했다. 한 입 마셔보는데 마시고도 그 의심을 버리지 못할만큼 아주 복합적인 향의 이색적인 맥주였다. 이후에도 구스 아일랜드의 여러 스타우트를 시켜 먹어보는데 하나같이 쉽게 접해볼 수 없는, 감각을 일깨우는 새로운 맛이었다.
미국의 스케일에 놀라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수제맥주를 접할 때인데 정말 그 종류가 무궁무진해서 미국 여행 중에 할 일이 없으면 그냥 동네 술집가서 그 지역 맥주만 마셔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수제 맥주는 가격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
맛있는 맥주와 훌륭한 선곡 (내가 사랑하는 더스미스, 펄프의 음악이 연달아 나왔다.)을 즐기고 기대하던 시카고 핫도그를 먹으러 갔다. 도대체 시카고 핫도그는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길게 줄이 서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며 가게를 찾아갔는데 이 가게가 맞는 가게인지 몇 번을 확인할 정도로 휑했다. 식당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전날 갔던 폴리쉬 소세지와 다르게 조리기구도 없었고 미리 준비된 야채와 소시지가 트레이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주문을 받는 아주머니, 아저씨의 얼굴이 전혀 잘 되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벽에 걸려있는 오바마의 사진만이 이 집이 맞는 핫도그 가게라는 사실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석연찮은 마음을 안고 주문을 하는데 아저씨는 계산한 손으로 빵을 집어 머스타드를 바르고 피클, 소세지, 고추를 얹어주었다. 밖에 테이블에서 먹으면 된다는 말에 따라 테이블에 앉아 한 입 맛을 보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맛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지역명물이 된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하는 맛이었다. 코스트코에 있는 재료들로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핫도그를 전달받을 때까지 눈에 보이는 조리 과정이 전무했다. 예상가능한 식재료들이 만들어내는 예상가능한 맛이었고 그 와중에 맛은 언발란스하기까지 했다. 여기 들어가는 피클이나 고추를 직접 만들었나는 상상을 해봤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에 들이는 노동이 아까운 맛이었다. 각 재료들도 정말 투박하게 놓여있어 완성된 요리인지 의심스러웠고 그렇게 놓여있는 모습과 소세지, 머스타드, 피클의 두더리지는 색감이전날 미술관에서 본 팝아트를 연상시켰다. 시카고 스타일의 핫도그를 Garden-picked hotdog라 부른다고 하던데 이건 여느 집 정원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요리라 생각했다. 외국인들이 진공 액상 소스 사용하는 국밥집을 보며 느끼는 감상이 이와 비슷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적어도 우리는 끓여서 내놓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시카고 핫도그라면 서울 핫도그를 훨씬 잘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다음 장소는 그린밀스라는 재즈바였다. 알카포네가 자주 들렸던 재즈바라는데무대 가장 가까운 곳에 앉게 되었다. 첫째날 방문한 재즈바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던터라 음악을 듣다가 졸까봐 걱정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그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바로 깨달았다. 엄청난 연주에 주체할 수 없이 흥이 차올라 탄성이 절로 나오고 몸이 들썩였다. 끝나고나서 춤을 춘 것마냥 다리가 떨릴 정도로 압도적인 흥이었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말하는 살아있는 느낌이 바로 이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건축을 몰라도 건축물에서 살아있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재즈를 모르는 나도 재즈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교감하듯이 음악이 스며들었고 악기 소리가 대화처럼 들렸다.
복잡계에 관한 책에서 재즈가 세상을 구성하는 원칙인 반복과 변주를 보여주는 최고의 예라고 설명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정말로 그러했다. 재즈는 반복과 변주로 만들어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닮아 있었고 이를 즐기는 나의 감상도 자연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공연을 즐기는 내내 자연스럽게 추임새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마치 나도 연주자의 한 명인것마냥 푹 빠져들었다. 곳곳에서 터지는 That’s right, Yeah, Alright, There you go같은 추임새와 환호, 나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재즈의 재미에 도저히 중간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결국 4시간이나 되는 공연을, 다시 말해 깨어있는 시간의 1/4을 재즈와 함께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4시간의 단 한 순간도 지루한 순간이 없었다. 잘 짜여진 스탠드업 코미디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시간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재즈가 어렵고 재미없다고 한다면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당신이 좋은 재즈를 보지 못했기때문이라고.
재즈의 여운을 가득 안고 나온 길거리에 한 피자 가게가 여전히 열려있었다. 뉴욕 스타일 피자라 써져있었고 그곳의 피자가게들처럼 이탈리아 이민자가 은영하는 식당같았다. 보통 미국에서 늦게까지 여는 식당들은 최소한의 인력으로 제일 간단한 음식을 비싸게 파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곳은 꽤 많은 사람들이 평소와 다르지 않기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늦게까지 문을 여는 식당에서 찾아보기 힘든 친절함도 있는 곳이었다. 슬라이스 피자 한 조각을 주문했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팬에서 구운 따뜻한 피자가 나왔다. 처음보는 브랜드의 다이어트 콜라로 목을 추이고 피자를 한 입 베어무는데 이 나라에서 먹어본 야식 중에 최고였다. 물론 이 피자도 토마토 소스와 치즈라는 피자의 맛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이 집만의 개성이 있었다. 피자의 반복과 변주, 이것도 재즈였다.
완벽한 셋째날을 보내고 시카고의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숙소를 나서는데, 눈이 내린다. 아, 마지막날 눈오는 풍경을 보여주다니. 이 도시가 너무 미웠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마치 헤어지려고 마음 먹은 날 예쁘게 하고 온 여자친구를 보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떼기 쉽지 않았다.
미국의 카페에서 보기 힘든 조화로운 인테리어를 해놓은 숙소 앞 베이글 가게에서 베이글을 먹고 거리를 산책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거리와 강변을 산책했다. 강을 따라 걷다보니 다시 미시간 호수변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눈 내리는 미시간 호수의 풍경은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회색빛 하늘과 호수는 오묘한 조화를 만들어냈고 그 주변을 따라 나란히 서있는 빌딩들은 그 날씨에 맞춰 더욱 깊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며 눈을 맞는데 정말 야속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시카고 피자였다. 이번에는 우노 피자로 방문했는데 가보고 나서 알았다. 피자같이 웬만해서는 비슷한 맛의 음식도 맛없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관광객으로 꽉 차있었던 우노 피자는 정말 형편없는 피자를 내놓았는데 그로 인해 첫 날 먹었던 그 때 당시에는 엄청 인상적이지 않았던 지오다노 피자가 얼마나 훌륭한 피자였는지 재평가하게 되었다. 이로서 나의 시카고 여행은 첫날까지 완벽해졌다.
시카고 여행을 마치고 LA로 오는 길에는 참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정말 행복한 기억이 많은 여행이었음에도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시이고 한동안 볼 수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슬펐다. 마치 무한도전에서 양세형이 김연아를 보고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 것처럼 이 곳과 다시 만날 날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그 정도로 시카고는 아름답고 훌륭한 도시였다. 서울과 별반 다를 것 없다고 한 시카고에 대한 첫째날의 나의 감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행복한 기억과 그리움만 남게 되었다. 정말 시카고는 누군가의 인생도시가 될만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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